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8 서울 올림픽 (문단 편집) === 인권 침해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mediaus.co.kr/8682_13969_3543.jpg|width=100%]]}}} || || {{{#ffffff '''<[[상계동 올림픽|{{{#ffffff 상계동 올림픽}}}]]>의 캡처 이미지'''}}} || >'''허울 좋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86]], 88올림픽이 없는 사람 다 죽여요. 살고 있는 주민들 다 쫓아내고 어쩌겠다는 거예요? 이건 재개발이 아니고 투기개발이요, 투기개발.''' >- [[말(잡지)|말]] 1986년 7월 31일자 p49. <투기 개발에 저항하는 [[오금동(서울)|오금동]] 세입자들>. 서울 올림픽은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철거민을 발생시킨 올림픽이고, 인구 및 면적 대비 비율로 계산하면 1위이다. 경제 규모 면에서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으나 정치, 사회적 성숙도는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국가가 올림픽을 개최하면 국가에 의한 대규모 인권 침해가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유사 사례로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1978년 월드컵 당시 경기장 옆 건물에서 사람들을 고문한 아르헨티나]], [[2020 도쿄 올림픽|2021년에 서울 올림픽 당시 한국 정부가 저지른 인권 침해들을 대부분 재현한 일본]], [[2022 카타르 월드컵|2022년 월드컵 경기장 건설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로 국제적 비난을 받은 카타르]] 등이 있다. '86, 88'이라는 마법의 주문 아래 경기장 건설 및 달동네 환경정비 및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수십만에 가까운 주민들이 한순간에 길거리로 내몰렸다. 심지어는 "성화봉송 중에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며, 전국 성화봉송 루트 주변 경관에 보여지는 판자집이란 판자집은 전부 무단으로 철거해버렸다. 또한 [[노숙자|부랑자]], [[거지]], [[지적장애|지적장애인]][* 구.정신지체], 자폐성 장애인들을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보이면 잡아다가 부랑자·장애인 보호시설에 수용시켰다. 사실 올림픽 개최 이후 장애인 올림픽인 [[패럴림픽]]이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인권 침해 문제도 발생했다. 이미 1982년부터 대규모 건설자본을 끌어들인 대대적 재개발사업 '합동재개발'이 실시되면서 올림픽 선수들이 입국하는 관문 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주 간선도로가 되는 [[국회대로]] 주변의 판자촌 및 [[빈민가]]는 이때 모두 철거되어 자취를 감췄다. 애석하게도 이 문제는 이후의 올림픽 때도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도 재개발 과정에서 150만 명이 넘는 서민들이 당국과 철거용역에 의해서 내쫓겼다. 민주국가들에서 펼쳐진 올림픽이라도 이러한 문제점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아서 이후에 치러진 [[2012 런던 올림픽]]과 [[2016 리우 올림픽]] 때도 경기장 근처에 있는 빈민촌을 재개발하고 거기서 살던 빈민들은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인 이주를 가든지 해야 했고, 심하면 당국과 건설업체에 의해 고용된 철거용역에 의해서 강제로 다른 곳으로 내쫓긴다거나 했다. 게다가 당시 달동네 터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조차도 서민용이 아니라 중산층 등 가진 자들을 위한 주택이었는데, 당국이 재개발 계획에 10평 미만짜리 소형 아파트까지 추가시킬 시 입주 예정자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투기꾼들이 달동네에 몰려와 불량주택을 사서 세입자를 내쫓고, 건설업체 사주를 받는 재개발조합 임원들까지 달동네 공동체사회까지 침해해가며 가담했다. 아울러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 등 황량한 부지도 '''있어 보이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오늘날 각각 [[목동(서울)|목동]][* [[목동신시가지아파트]]]과 [[상계동]]의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는 곳인데, 이 과정을 통해 허허벌판과 공장 지대이던 [[양천구]]와 [[노원구]]는 급격하게 풍경이 달라져 대규모 주거 단지이자, [[8학군]]에 버금가는 명문 [[학군]],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울러 [[경기도]] [[부천시]]의 [[원미구|원미]], [[오정구|오정]] 일대도 역시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빈민가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점점 밀리고 밀려나 [[관악구]] [[난곡동]]이나 서울 밖으로 쫓겨났다.[* 이제 난곡도 [[2000년대]] 난곡뉴타운으로 재개발되었다. 여기 살던 빈민들은 '''아예 [[서울특별시]]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다룬 다큐 영화가 [[https://www.kmdb.or.kr/db/per/00001158|김동원]] 감독[* 1955년생.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및 동 대학 대학원 신문방송학 졸업. 1983년부터 3년 동안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감독 등에게서 연출 수업을 받아 1987년부터 3년 동안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 상임연출가로 일했고, 1991년 '푸른영상'을 세워 <행당동 사람들(1994)>,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 <또 하나의 세상 - 행당동 사람들 2(1999)>, <송환(2003)>, <내 친구 정일우(2017)>, <2차 송환(2022)> 등 독립영화 제작을 통해 민중 문화운동을 펼쳤고, 1991년 독립영화협의회 위원장도 맡았으며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창설을 주도하며 5년 동안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의 <[[상계동 올림픽]]>인데, 1986년부터 2년 동안 만들었으며 1989년 제39회 베를린 영화제 포럼부문과 1991년 제2회 야마가타 국제영화제에 각각 초청되었다. 이때 상계동 천막촌의 철거 이유는 '''성화 봉송이 이쪽으로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보기 좋으라는 식이었으나,''' 정작 주공아파트가 지어지고 나서 [[동일로]]에 신호등 설치도 안 하는 등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졌다. 심지어 전국 도시 노점상도, 성남 모란시장 역시 폐쇄 대상에 올랐다. 철거민, 노점상 등 도시빈민들을 쫓아내면서 겉보기에는 도시 미관이 좋아졌지만, 이미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통해 [[1970년대]]부터 끓어오르던 하층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말았다. 이로 인해 1986년 10월 31일 신당 6동 강제철거 당시 철거민 2명이 분신을 기도했고, 12월 4일에는 철거민 1명이 자살하기도 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5명이었으며, 1986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14명이었다.[* 출처: <가짐없는 큰 자유: 빈민의 벗, [[제정구]]의 삶(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저.)> 학고재. 2000. p180.] 그러나 철거민 문제가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 된 계기가 바로 1988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이었다. 결국 그 분노는 그대로 폭발하여 올림픽 개막 1년 전인 1987년에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탄생시켰고, 이는 1993년 [[전국철거민협의회]], 1994년에는 분파인 [[전국철거민연합]]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8년 6월 29일에 수도권 등 30여개 지역 주민들이 '반민중적 올림픽으로 탄압받는 도시빈민 규탄대회'를 열었고, 오후 8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서민주택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전개했으나, 올림픽 열기에 밀려 파급되지 못했다. 게다가 1988년 8월 5일부터 제정/시행된 [[http://law.go.kr/lsInfoP.do?lsiSeq=2452|'올림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법률']]에 따라서 현월 17일부터 올림픽 기간 중 전국 주요도시 특정구역에 [[https://news.joins.com/article/2267740|'평화구역']]이 선포되었고 해당 구역 내에서는 어떠한 집회/시위가 금지되었다. 그 증거로 8월 18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주지역 8개 재야단체들이 5.18 진상규명 투쟁을 벌이다 평화구역이란 이유로 경찰에 강제 진압되었고, 서울시내(당시 종로, 을지로, 충무로) 극장에서 열린 [[미국 영화]] 직배반대 투쟁도 휴관 형식으로 경찰과 대치해가며 시위를 펼쳤으나 이후 마찬가지로 무산되었다. 서양의 이목을 의식해 주요 도시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때도 이 때. 수많은 서울 시내와 경기가 열리는 곳 주변, 대로변 [[보신탕]] 집들이 문을 닫았고, 보신탕이라는 이름 대신 사철탕, 영양탕, 보양탕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위성 도시나 변두리로 쫓겨나 음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개고기 반대론자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근절되지 않으면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동물보호 운동가인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농촌장터에서 개를 도살하는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한국인은 야만인”이라고 공격한 이후, 1995년 3월 한·불 정상회담 당시 파리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개고기 판매를 금지하라”고 요구했다. 1996년에는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월드컵 기간 동안에 개고기 판매를 금지한다는 각서를 써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2001년 MBC 라디오 시사프로 <시선집중>에서 MC인 손석희 아나운서와의 국제전화 인터뷰 도중 “개를 먹는 사람에 대해 결코 존중해 줄 수 없다. 아무리 차이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거기에 한계가 있다”며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라는 손 아나운서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군대도 보여주기식 정책을 폈다. "군인들이 거리에 보이면 위압적이고 남북이 심각한 대치 상황인 것처럼 보여 안 된다"고 하여 군복 입고 출퇴근 하던 당시 [[방위병]][* 현재의 [[사회복무요원]]이나 [[상근예비역]]에 해당]은 대회 기간 동안 평상복을 입고 다니게 했고, 군용 차량은 서울 시내 주행이 전면 금지되었다. 주둔지가 서울시내라 꼭 다녀야 하는 수방사 소속 차량은 얼룩무늬 위장색 위에 파란색이나 회색, 황토색 등 단색을 칠해 다니게 했고, 수도권 부대 병사들의 휴가 외출 외박도 안 줬다고 전해지고. 지역 부대 소속 장병들 또한 군복을 입고 서울시 주변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아예 금지시켰다고 한다.--그냥 휴가자들 사복 입히면 되잖아......--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은 1988년 올림픽 직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올림픽의 예행 연습이라 할 1986년 아시안 게임 말고도 1983년 IPU 총회, 1986년 IMF 및 IBRD 총회 등의 국제행사가 우리나라에 개최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도시 빈민들과 힘 없는 이들에게 장기간 고통을 주고, 외국인들에겐 쌍수 들어 환영하는 저자세를 보여줬다. 위와 같은 참상은 [[월간 말]]이나 [[한겨레신문]]같은 재야 언론을 제외하고는 주류 언론에서 보도되지 못했으며, "올림픽을 잘 치러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특히 중산층)가 너무나 강해 사회 구성원 중에 운동권에 가담한다든가, 자신에게 이러한 해당 사항이 직결되지 않는 이상 정부가 내세운 정책의 부당함과 힘 없는 이들의 고통에 관해 잘 직시하지 못했다.[* 영화 홀리데이의 모티브가 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당시 희대의 키워드를 곰곰히 생각해보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